세(世) |
21 |
22 |
23 |
24 |
25 |
자(字) |
穆 ㅇ |
ㅇ 義 |
禮 ㅇ |
ㅇ 智 |
ㅇ 洙 |
세(世) |
26 |
27 |
28 |
29 |
30 |
자(字) |
來 ㅇ |
ㅇ 煥 |
奎 ㅇ |
鎬 ㅇ |
ㅇ 濟 |
세(世) |
31 |
32 |
33 |
34 |
35 |
자(字) |
柄 ㅇ |
燦 ㅇ |
基 ㅇ |
鍾 ㅇ |
ㅇ 永 |
세(世) |
36 |
37 |
38 |
39 |
40 |
자(字) |
相 ㅇ |
ㅇ 燮 |
載 ㅇ |
ㅇ 鏞 |
ㅇ 漢 |
세(世) |
41 |
42 |
43 |
44 |
45 |
자(字) |
ㅇ 稷 |
性 ㅇ |
ㅇ 均 |
鍵 ㅇ |
ㅇ 澈 |
세(世) |
46 |
47 |
48 |
49 |
50 |
자(字) |
ㅇ 株 |
憲 ㅇ |
ㅇ 珉 |
鎭 ㅇ |
ㅇ 潤 |
※ 본항열표는 7수보(1917) 및 8수보(1958)때 정한 것임.
陽城李氏는 시조 李秀匡(수광)이래로 900여년 30餘世를 내려오는
동안 고려때는 將相에 줄을 이어 世人에 羨望(선망)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秀匡의 아들 臣靖(신정)은 吏部尙書에 오르고 손자 元儀(원의)는
密直司承旨同正, 증손 英柱(영주)는 判密直司事上將軍을 역임하는 등 陽城李氏는
첫출발부터 華麗 했다.駙馬公 英柱는 또 忠烈王의 딸 順正公主를 아내로
맞아
왕실과 姻戚(인척)관계를 맺으며 가문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玄孫인
천
또한 三重大匡 金吾衛大將軍僉議評理 陽城君에 封해졌으며
슬하에 다섯아들을 두었다.큰아들 六世 石灘公 守邦(一名 那海)은 都僉議評理
判密直司事 陽城君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때 인품과 재능이 영종의
눈에 띄어 총애를받아 直省舍人의 벼슬과 함께 那海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石灘公(석탄공)께서는 春富,仁富,光富,元富의 네 아들이 있어 위로
세아들은 모두 侍中에 올랐고 막내 元富도 尙書벼슬를 해 모두 大顯하니
세상의 부러움을 샀다.사람들은 那海같이 됐으면 하는뜻에서 "似那海(사나해)"라고
한 것이 "사나이 大丈夫(대장부)"란 말의 기원이 됐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그런데 石灘公의 큰아들 七世 侍中公(시중공) 春富는
당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만회하려는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배원자립,토지제도
개혁등 일련의 개혁정치를 펴 위기에 처한 국난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코자 진력한바 있었다.그러나 親元守舊勢力(친원수구세력)의 완강한
저항과 奸惡(간악)한 무리들의 터무니없는 中傷(중상)으로 1371년 공민왕
20년 7월 雄志(웅지)를 펴지 못한채 禍(화)를 입어 이로 인하여 沃(옥)
등 아들과 光富,元富 등 아우들까지도 혹은 隸編(예편),혹은 流配(유배)를
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그러나 때마침 江陵府에 編隸(편예)돼있던 큰아들
八世 靖節公(정절공) 沃이 東海岸 江陵道一帶의 州郡을 焚蕩(분탕)하던
倭寇(왜구)를 名弓手로서 출전,奇計(기계)와 勇力(용력)으로 力戰擊退(역전격퇴)한
殊勳(수훈)으로 父寃(부원)을 펴 다시 官路를 열어 百尺竿頭(백척간두)에선
一門의 위기를 극적으로 타개했다. 高麗朝에 문벌로 환로의 정상을 달렸던
양성이씨는 새왕조 조선이 들어서자,高麗世臣으로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不事二君(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석탄공의 셋째아우 六世 判事公(판사공) 守仁은 조선이 들어서자
杜門洞(두문동)에 들어가 72賢중의 한분이 되었고, 장손 江陵道節制使(강릉도절제사)
沃(옥)도 조선조에서 資憲知中樞院事(자원지중추원사),判漢城府事(판한성부사)
등의 벼슬을 내리며 懷柔(회유)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사후
공의절개를 기려 朝廷(조정)은 靖節公의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새시대에 참여 가문의 隆盛(융성)을 지켰다.특히
세종조에 이르러 德治(덕치)의 틀이 잡히고 새왕조가 문화의 꽃을 피우자
문무를 겸비한 많은 인재가 참여 가문의 융성과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石灘公의 넷째아우郡事公 守林(수림)의 아들 七世 推(추)는 漢城府左尹,
黃海道觀察使를 歷任 淸白吏에 入錄되고 二侍中公(이시중공) 仁富(인부)의
아들 八世 之實(지실)은 工曹判書(공조판서)에 올라 李從茂 柳濕과함께
右軍都節制使로 저 유명한 對馬島征伐에 공을 세웠다.또한 靖節公의
둘째아들 九世 思謹(사근)은 海州牧使(해주목사)로 치적이 빛났으며
셋째아들 恭昭公 思儉(사검)은 세종을 세자때부터 보필, 4회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中外(중외)에 명성을 떨쳐 左贊成 陽城府院君에 오르고,
넷째아들 思任(사임)은 兵器製造에 힘써 判漢城府事에 올랐으니 모두
조선조초기의 국방외교강화에 공이커 조선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던
양성이씨의 빼놓을수 없는 인물들이다.
양성이씨는 조선조초기에 이렇게 환로를 터 判書 正二品 이상의 고관만해도
堂內(당내)간에 12명을 배출 했으며 이후 문과급제자는 태종때 大司諫公
九世 壅(옹)을 비롯 38명에 달했다. 世宗 때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발명가인 十世 靖平公 純之(순지)가
그첫손에 꼽히는 인물 석탄공의 현손인 靖平公은 兵曹判書를 지낸
孟常(맹상)의 막내아들로 判中樞院事에 까지 올랐는데, 형 3분과 함께
四子登科 한집안이다. 세종의 명을 받아 金淡(김담)등과 협조 曆法(역법)을
연구하고 仰釜日晷(앙부일귀) 自擊漏(자격루) 簡儀圭表(간의규표) 大平縣珠
등을 만들 때 장영실이 참여 했으며, 諸家曆象集(제가역상집) 등 많은
천문학서적들을 編纂했다.공은 算學,天文,陰陽,풍수 등 자연과학의 대가였는데
그중에도 김담과 함께 쓴 七政算內外篇(칠정산낸외편)은 유명하다.
특히 공의 저서중
交食表에 실린 500여년 전의 서울의 위도가 오늘날의 서울의 위도와
일치하고 있음은 놀라운일이 아닐수 없다.
靖平公의 장조카로 문장가 의학자로 알려진 十一世 文質公 芮(예)
또한 刑曹判書까지 오른 인물, 공은 集賢殿 副校理로 있던 1445년 "醫方類聚(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 했으며 工曹判書로 있던 성종8년 婦女再嫁禁止의 여부를
놓고 조정의 의견이 분분할대 조건부개가론을 주장하여 채택토록 함으로써
조선왕조의 기본방침이 되게 했다. 이분들과 함께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成宗때 4대문장가중 한분으로
斯文領袖(사문영수)로 숭앙받는 文簡公(문간공) 十一世 承召이다.靖節公의
증손이자 赤城君 온의 아들인 공은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藝文館提學으로
있을때 "明皇誡鑑(명황계감)"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신숙주
강희맹 등과 "國朝五禮儀"를 내는가하면 文集 "三灘集(삼탄집)"을
남겼다. 공은 당시 문장으로 이름높던 서거정과 어께를 나란히 한 대문장가
였는데 특히 용모와 態度가 端雅淸淨(단아청정)해 "金玉君子"라고도
불렀다. 監司公 推(추)의 증손인 十世 大司憲公 世英도 文名이 높았고 淸簡(청간)으로 選入되었으며 宰相(재상)材木으로 지목된
큰인물이었는데
아깝게도 早世하였다.
이와같이 많은 인재를 배출함으로써 門運의 중흥을 맞이 하였으나
七世 漢城府尹公(한성부윤공) 之澤(지택)의 사위인 황보인이 癸酉靖難(계유정난)때
김종서와 함께 被禍(피화)되고 수양대군이 어린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당시 工曹參議(공조참의)로 있던 恭昭公(공소공)의 아들 十世
徽(휘)는 이에 항거단종복위를 꾀하다 성삼문, 이개 등 사육신과 함께
순절 하였다.이후 양성이씨는 벼슬을 멀리 하려는 은둔사상이 움트게
되어 혹은 강호에 자적하고 혹은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만
전렴하는 청빈낙도의 생활에 젖어 들어갔다. 參議公(참의공) 徽(휘)는 사육신중 목은 이색의 증손인 이개의 매부다.참의공이
순절하자 堂叔 判尹公(판윤공) 伯良(백량),縣監公 興秀(흥수),사촌적성군
온, 縣監公 진, 三從인 麻田公(마전공) 攸直(유직) 堂姪(당질)
鹿村公(녹촌공) 承明 등이 벼슬을 버리고 숨어버려 세상에서는 이분들을
은육신이라 불렀다고 한다.
1592년 임란이터져 민족의 존망이 벼랑에 선위기에 직면하자 충절의
가문 양성이씨는 은둔주의를 폐리처럼 내던지고 분연히 일어서
구국의 전선에 앞다투어 나섰다.순국열사만도 10여명 그중에서도 충무공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다 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함께 산화한 加里浦僉使(가리포첨사)
겸 助防將(조방장) 十三世 英男將軍은 陰竹縣監 季寶(계보)의 현손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公은 19세에 武科에 급제 宣傳官.訓練院僉正(훈련원첨정)을 거쳐
1592년 임란이 터질 당시에 慶尙右水使 元均 휘하의 율포만호로 있었다.원균이
첫싸움에서 패하자 全羅左水使로 있던 이순신을 5.6차례 찾아 원병을
청했다.이때부터 7년간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忠武公을 보좌했다.
公에대한
忠武公의 신임은 매우 두터워 "亂中日記"에는 李英男將軍의
이름이 69번이나 등장한다.
加里浦僉使 겸 助防將公은 漕舟(조주)에 익숙한 莞島장정들을
古今鎭에 소집 훈련시켜 수군을 정비해 1598년11월19일 7년전쟁을 마무리짓는
최후의 露梁海戰에 출전 대승을 거두고 忠武公과 함께 순국했다.
그때 나이 33세, 순국후 兵曹判書로 追贈(추증) 宣武原從功臣一等(선무원종공신일등)에
敍錄됐다. 全南 莞島의 古今島 忠武祠에 1959년에 位牌(위패)를,1985년4월에는
影幀(영정)을 忠武公과 함께 配享(배향)했다. 忠北 鎭川에도 顯忠碑와 史蹟碑가 세워져 있다.
羅大用과 함께 忠武公 휘하에서 거북선 제작에참여하고 역시 露梁海戰에서
순국한 正郞公(정랑공) 守義(수의)의 증손 萬戶(만호) 十四世 渫(설)도
宣武原從功臣一等 統制使(통제사)로 追贈(추증)됐다. 義兵의 원조인 愛日堂 13세 光翼은 宣祖가 義州로 播遷(파천)하자 甥姪 金千鎰과 종제 광주(光宙)를 불러 국난에 목숨을 바쳐 싸울것을 당부하고,
高敬命 등에게 倡義(창의) 檄文(격문)을 띄우고는 宣祖가 있는 行在所로
달려가다 73세의 老軀로 公州에서 숨을 거두었다. 義兵將으로 晋州 矗石樓(촉석루) 전투에서 憤死한 11世 宏(굉), 蔚山郡守로
분전하다 순국한 13世 언함 杆城郡守로 의병을 領率,申砬과 함께
忠州 達川에서 순국한 14世 忠信 露梁戰에서 左翼將으로 奮戰하다 순국한
愛日堂의 아들 14世 成燦,丁酉再亂에 노량전에서 순국한 14世 振,
推兄弟, 포수로 활약한 4촌 大鳴, 平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丁酉再亂때는 昌寧의 火旺山城에서 密陽府使로
加
藤淸正의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三道流制使를 지낸 14世 英 등도 빼놓을수 없는
인물 들이다.
이밖에도 자기 몸이 늙어 병상에 있으면서도 13世 筌(전)은 아들 3형제
元男, 儀男,智男과 함께 忠武公麾下에서 해전에 참전했고, 江界判官公
14世 敬信도 露梁戰에서 순국했으며, 助防將公의 三從인 13世 廷英도
鎭川에서 義兵將으로 申砬장군 휘하에서 참전, 宣武扈聖 淸難(선무호성청난)
등 三重原從功臣이 됐고, 栗谷文人인 14世 軫(진), 璧(벽)은
의병을 일으켜
扈駕(호가)하거나 참전하여 扈聖功臣(호성공신)으로 冊綠되기도 했으며,
江界判官 15世 德男도 선무원종 공신에 冊錄(책록)되어 사대부가로서의
진면목을 충분히 발휘했다.1627년 丁卯胡亂때도 統制使公 英의 넷째아들
15世 應立(응립)이 참전 순국했다. 1636년 丙子胡亂에서도 訓練院奉事 15世 繼希(계희)는 素沙陣戰鬪에서
濟州判官 15世 大新은 南漢山城에서 순국했으며, 江界判官公 敬信의 아들
刑曹正郞 15世 秀林은 南漢山城戰鬪에서 크게 戰功을 세우는 충절을
지켰다. 學問과 文章으로 陽城李氏를 빛낸 인물중 두드러진이는 文簡公 承召,文質公
芮(예),大司憲公 世英 외에도 參奉公 文齡,司僕寺正公 夢吉 등이 있다.
參奉公 13世 文齡은 벼슬은 參奉에 그쳤으나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當代의
巨儒(거유) 栗谷 李珥와 修契講論(수계강론)하였는데, 栗谷은 늘 公의
인품에 감탄하여 石村尊師라고 높이 불렀다. 性理學者 15世 夢吉은 문장이 뛰어나 月沙 李廷龜柳起門 등과 함께
洛中八賢으로 꼽혔다.
公의 아들 參議公 得坤(득곤)은 名利에 淡白해
光海君이 수차에 걸쳐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鎭川 斗建洞 산속에 묻혀
대추나무 기둥으로 정자를지어 마음의 물결을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息波亭(식파정)이라
이름짓고 優遊自適하였다. 息波亭에는 崔鳴吉과 宋時烈 등의 詩를새긴
懸板이 22 점이나 걸려있다. 同知中樞府事公 18세 寅錫은 12州牧을 지낸후 耆社(기사)에 들었고
北道出身으로 重用된 同知中樞府事公 17世 格은 致任 하던날 볏짚 3단
만을
남겼으며 進士公 20世 최賢(최현)은 학문 문장이 뛰어나 正祖로부터
才翁(재옹)이란 別號를 받기도 하여 남들이 博雅君子라 부르기도 했다.
1801년 純祖1년 天主敎人들에 대한 辛酉獄事때 예수肖像 3장을 그려
黃嗣永에게 보낸 혐의로 처형된 최초의 서양화가 秋餐(추찬) 21世 喜英,
1895년
閔妃가 시해되자, 羅州서 상소와 함께 倡義檄文(창의격문)을 띄웠던 謙山,
23世
炳壽는 松山精舍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謙山集과 錦城正義錄을 저술한
韓末碩儒였다. 韓末 義兵將公 24世 能權은 만국평화회의에 밀파되는 李儁, 李相卨을
국경까지 호송했던 義兵將,高宗의 密令을 받아 江華에 大東倡義陣을
설치하고 군자금과 군량미를 조달 海州 등지의 義兵들을 지원하고 왜적
200여명을 강화 船頭浦平野로 유인 섬멸했다.
1909년 同志들과 함께 漢陽에 잠입했다가 密告로 왜군에 잡혀 46세로
순국했다. 江華 永慕齋에 봉위 되었으며, 國家建國勳章國民章(575호)이
추서되고 大田國立墓地 순국선열 墓域에 모셔졌다. 乙巳保護條約締結後 羅州에서 竹峯
金泰元 義士와 함께 義兵을 모집
1909년8월 羅州 東幕洞戰鬪에서 순국한 24世 東衍(동연)義士도 있다.
이밖에도 광복때까지 日帝流治下에서 義兵활동 3.1운동 上海臨時政府
등 국내외 항일독립지사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여명에 달한다.
특히 3.1운동때는 가평에서 24世 圭鳳 圭鵬, 25世 胤錫, 萬錫,坡州에서는
24世 泳震,26世 文燮,華城에서는 26世 源行 등이 주도한 인물들이다.
朝鮮朝를 통해 양성이씨 文科及第者는 38명, 君號를 받은이는 6명 諡號 5명 湖堂 1명 功臣 38명,王子師傳 5명 廟祠(묘사) 및 書院에
配亭된이가 11명 孝子旌閭(정려) 20명이나 된다. 可히 文武를 兼全한
陽城李氏家門의 眞面目을 窺知(규지)케 한다. 政府樹立後 요직을 지낸인사로는 外務部長官 國會議員 26世 東元,陸軍少將
24世 曉 農林部次官補 27世 星煥, 交通部企劃管理室長 27世 東喜,
6選國會議員으로
27世 忠煥,國會議員 26世 暾海, 國會議員 28世 龍鎬, 勞動部次官.國會議員
27世 龍俊, 陸軍 少將 25世 年新, 判事 27世 鎬元, 陸軍大將 27世 在寬,陸軍中將
28世 鎬昇, 木浦大總長 23세 泰根,
文化公音部次官 27世庚文 등이 있다.
陽城李氏는 總 9大派로 30余代를 내려오는 동안 3만8천여명에 이르는
수에 달했으며,麗朝에는 주로 정치외교무대에서 화려한 활동을 해 왔으나,
朝鮮朝에 와서는 忠節淸直한 士族의 矜持를 고수하여, 정치보다는 학문을
선호하고 부귀보다는 安分에 自足해온 氏族으로 오늘에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다.
거주지 |
거주인원 |
점유비율(%) |
비 고 |
서 울 |
11,506 |
30.0 |
○ 거주인원은 1985.11.1일 조사자료 임
※ 성씨 관련자료는 85년 처음 실시하였
고 2000.11월에 두번째로 실시하였으
나 아직 자료가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2002년 6월경에 자료가 발표될 예정
입니다.
|
부 산 |
1,473 |
3.8 |
대 구 |
1,192 |
3.1 |
인 천 |
1,793 |
4.7 |
경 기 |
7,565 |
19.8 |
강 원 |
1,053 |
2.7 |
충 북 |
2,107 |
5.5 |
충 남 |
2,170 |
5.7 |
전 북 |
1,442 |
3.8 |
전 남 |
5,989 |
15.6 |
경 북 |
1,133 |
3.0 |
경 남 |
805 |
2.1 |
제 주 |
74 |
0.2 |
계 |
38,302 |
100 |
우리
조상님들의 빛난 업적을 소개합니다.
이수광(李秀匡)
시조(始祖) 송조특진금오위대장군상주국(宋朝特進金吾衛大將軍上柱國), 고려삼중대광보국양성군(高麗三重大匡輔國陽城君)
이영주(李英柱)
高麗 忠烈王(고려 충렬왕)의 부마,승지(承旨) 원의(元儀)의 아들.관성 현령(管城 縣令)을 거쳐 1274년(충렬왕 즉위년)
내원승(內園丞)으로 낭장(郎將)에 특진하고,1280년(충렬왕 6년) 정역별감(程驛別監)을 지낸후 1282년 인물추고별감(人物推考別監)이 되어
전국을 순찰하며 지방관리의 비행을 살핀후1285년 충청도안집사(忠淸道按集使)로 강윤명의 난을 평정 하는데 공을 세웠다. 1298년(충렬왕
24년) 군부판서(軍簿判書)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으며 1300년(충렬왕 26년) 밀직사사(密直司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 왔다.
이천
판밀직사사 영주(英柱)의 아들 충숙왕때 삼중대광.금오위 대장군(三重大匡.金吾衛大將軍).첨의평리(僉議評理).개성윤(開城尹)으로 陽城君에
봉해졌고,1321년(충숙왕 8년) 6월에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 왔다.
이수방(李守邦)
? ∼1341년(충혜왕 2년) 號는 석탄(石灘) 첨의평리 천의 아들.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상호군(上護軍)을 거쳐
陽城君에 올라 元나라에 갔을 때 영종(英宗)으로부터 나해(那海)라는 이름과 직성사인(直省舍人)의 벼슬을 下賜(하사)받고 돌아와
1327년(충숙왕 14년)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이수전(李守全)
고려때 양성군에 봉해 졌다.
이수인(李守仁)
첨의평리(僉議評理) 천의 아들.高麗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순절 하였다.
이춘부(李春富)
?∼1371(공민왕 20년)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수방(守邦)의 아들.고려 충정왕(忠定王)때
지신사(知申事).우대언(右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등을 역임하고,1358년(공민왕 7년)서강 병마사(西江兵馬使)로서 왜구의 침입을
격퇴했다.이듬해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오르고 1360년(공민왕 9년)동강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를 거쳐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王都 開城이 함락되었을 때 전라도도순검겸병마사(全羅道都巡檢兼兵馬使)로 이를 물리쳐 수성보절일등공신(輸誠保節一等功臣)에
책록되고,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거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후 1367년(공민왕 16년)충근절의
동덕찬화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功臣)으로 양성부원군(陽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이듬해 삼중대광도첨의 시중(三重大匡都僉議侍中)에 올랐다.
이인부(李仁富)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수방(守邦)의 아들.高麗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하였다.
이광부(李光富)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수방(守邦)의 아들.高麗 때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으로 삼중대광.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을 지내고
양성부원군(陽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원부(李元富)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수방(守邦)의 아들.정의대부(正議大夫).총랑상서(摠郞尙書)를 거쳐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에
이르렀다.
이추(李 推)
?∼1425년(세종 7년) 군사(郡事) 수림(守林)의 아들.1407년(태종 7년) 상호군(上護軍)겸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지내고,이어
창원부사(昌原府使).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였다.1418년(태종 18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이어
황해도도관찰출척사(黃海道都觀察黜陟使) 겸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판진주목사(判晉州牧使)를 지냈다.
이옥(李 沃)
?∼1409년(태종 9년)시호는 정절(靖節),도첨의시중 춘부(春富)의 아들.고려 때에 강릉도절제사를 거쳐 좌상시(左常侍)에
이르렀다.조선시대에 들어와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빈
?∼1388년(우왕 14년) 도첨의시중 춘부(春富)의 아들.1385년(우왕 11년)무예도감사(武藝都監使)를 거쳐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재직중 왜구와 용전분투하다 장렬하게 순국 하였다.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이지실(李之實)
문하시중(門下侍中) 인부(仁富)의 아들.1401년(태종 1년)남포진병마사(藍浦鎭兵馬使)가 되고 이어 경기좌우도 수군도절제사(京畿左右道
水軍都節制使).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안주 절제사(安州節制使).강계도도병마사(江界道都兵馬使) 등을 거쳐 1413년(태종 13년)
충청도병마절제사(忠淸道兵馬節制使)가 되었다.1419년(세종 1년)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오르고 충청도 도체찰사(忠淸道都體察使)를 겸인.이어
황해도조전병마도절제사.충청도 조전절제사를 지내면서 대마도 정벌을 계획.이종무(李從茂),류습(柳濕)과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와
1420년(세종 2년)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고 1423년(세종 5년)에는 경주 부윤(府尹)이 되었다.
이사검(李思儉)
1381(우왕 7년)∼1446년(세종 28년) 시호는 공소(恭昭),정절공 옥(沃)의 아들,1405년(태종 5년) 武科에 급제,사직(司直)을
지내고 1408년(태종 8년)양녕대군이 명나라에 조하(朝賀)할 때 수행 했으며, 1418년(태종 18년)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세자 부좌관(傅佐官)으로 보좌하고 상호군(上護軍)에 승진했다.1427년(세종 9년) 상호군으로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35년(세종 17년)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1439년(세종 21년)경상좌도 도절제사를 거쳐
1444년(세종 26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고 익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양성부원군(陽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사임(李思任)
정절공 옥(沃)의 아들.1422년(세종 4년) 행수를 거쳐 1426년(세종 8년)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1430년(세종 12년) 간성군수가
되고,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1437년(세종 19년)安東,金海府使로 경상좌도절제사를 겸임했고,1442년(세종 24년)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충청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등을 거쳐 1444년(세종 26년)
형조참의(刑曹參議),1446년(세종 28년) 전라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었다. 1448년(세종 30년)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고,1449년(세종 31년) 공조참판(工曹參判)1450년(문종즉위년) 경상우도 수군처치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군기감제조(軍器監提調)로 재직시 병기제조와 국방력강화에 힘썼다.판한성부사로 원종공신 3등에 책록 되었으며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맹상(李孟常)
1376년(우왕 2년)∼? 호는 이수,참판 한(澣)의 아들.1411년(태종 11년) 강릉판관(江陵判官)을 거쳐 1424년(세종
6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1437년 (세종 19년) 지사간(知司諫)이 되고,다음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겸
지형조사(知刑曹事),1439년(세종 21년) 형조참의(刑曹參議),1440년(세종 22년) 원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가
되고,1441년(세종 23년) 공조,호초참의가 되었다.1443년(세종 25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중추원 부사(中樞院 副使)를 역임
하였다.
이중(李重)
판중추원사 강실(剛實)의 아들.1428년(세종 10년) 지평(持平)을 거쳐 1430년 (세종 12년)判官1433년(세종 15년)
충청도경력(經歷),1440년 (문종 즉위년)양주부사로 선정을 베풀었고,1450년 (세종32년) 판봉상사사(判奉常寺事)를 지냈다.1451년(문종
1년)성주목사,1456년(세조 2년) 충청도관찰사,1458년 (세조 4년) 황해도 관찰사에 올랐고,이어 봉상윤(奉常尹)으로 원종공신 3등에 책록
되었다.
이백량(李伯良)
?∼1457년(세조 3년) 판군기사사(判軍器寺事) 징의 아들.세종 때 부터 주.군관장을 지냈고, 1451년(문종 1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선정을 베풀어 검교판한성부윤(檢校判漢城府尹)에 올랐다.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문종이 늠록을 특사하여 여생을 마치니 후인이
그 마을을 공세동(貢稅洞)이라 하였다.단종복위의 사화가 일자 함양계도곡(咸陽鷄刀谷)에 은거 은육신(隱六臣)이 되었다.내자윤(內資尹)으로 원종공신
3등에 책록 되었다.
이온
?∼1466년(세조 12년) 호는 화산(花山),해주목사 사근(思謹)의 아들.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군국의 정권을 장악한 이후로는
재덕을 숨기고 해주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니 사람들이 화산처사라 하였다.조정 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문장과 덕행이 일세를 풍미
하였다.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숭록대부(崇錄大夫)에 오르고 적성군(赤城君)에
봉해졌다.
이휘(李徽)
?∼1456년(세조 2년) 자는 미경(美卿),호는 송죽헌(松竹軒),사검(思儉)의 아들.1435년(세종 17년) 문과에 급제
우정언(右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냈고,1455년(세조 1년)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오르고 이어 직제학(直提學) 승지(承旨)등을
역임하였다.1456년(세조 2년) 공조참의로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 등 사육신과 함께 피화 순절 하였다.
이순지(李純之)
1406년(태종 6년)∼1465년(세조 11년) 자는 誠甫, 시호는 靖平,병조판서 맹상(孟常)의 아들.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세종의 명으로 역법을 연구하기 시작,1434년(세종 16년) 의상(儀象)을
교정하고,간의(簡儀).규표(圭表).천평(天平).현주(縣珠),앙부일귀(仰釜 日晷),보루각(報漏閣).흠경각(欽敬閣)의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었다.1450년(문종즉위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의,1452년(단종 즉위년)예조참판,이어 호조참판,한성부윤을 지내고
1458년(세조 4년) 공조참판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1459년(세조
5년)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1461년(세조 7년)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1465년(세조 11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상호군(上護軍)
등을 역임 하였다. 성격이 치밀하여 산학(算學),천문(天文),음양(陰陽),풍수(風水) 등 여러방면에 능통했고,저서로는
천문류초(天文類抄),교식추보가령(交食推步假令),선택요략(選擇要略) 등이 있다.
이유직(李攸直)
대경(大卿) 백자(伯孜)의 아들.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지내고,1455년(세조 1년) 단종 손위 후 은신 불사하니 은육신(隱六臣)이라
칭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이세영(李世英)
1452년(문종 2년)∼1510년(중종 5년) 자는 군실(君實),참판 옥번(沃蕃)의 아들.1477년(성종 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 봉상사첨정(奉常寺僉正).지평(持平),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고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1497년(연산군 3년)집의(執義),전한(典翰),이듬해 홍문관제학,좌부승지(左副承旨) 등을
지내고,1502년(연산군 8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참판(工曹參判),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1508년(중종 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 하였다.문명이 높았다.
이승소(李承召)
1422(세종 4년)∼1484년(성종 15년)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시호는 문간(文簡),적성군(赤城君) 온의
아들.1447년(세종 2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집현전 부수찬이되고,같은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부교리(副校理).응교(應敎)를
거쳐 장령(掌令),좌필선(左弼善),집현전직제학,보덕(輔德) 등을 역임하고 원종공신 2등에 올랐다.1457년(세조 3년) 예문관제학, 이어
대사성(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호조참의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1463년(세조 9년) 왕명으로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옳기고 충청도 관찰사,예문관제학 겸 예조참판을 지냈다.1471년(성종 2년)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지고
1474년(성종 5년) 신숙주 강희맹 등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했다.1480년(성종 11년)우참찬(右參贊)으로 주문부사(奏聞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이어 형조판서(刑曹判書)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예악(禮樂),병형(兵刑)음양(陰陽)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었고,역대병요(歷代兵要)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찬술에도 참여하였다.
이예(李芮)
1419년(세종 1년)∼1480년(성종 11년) 자는 가성(可成), 만성(萬成),호는 눌재(訥齋),시호는 文質,전지(全之)의
아들.1441년 (세종 23년) 식년문과에 급제,군기사직장(軍器寺直長)을 거쳐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가 되고 1445년(세종 27년) 부교리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 하였다.이어 부수찬을 지내고 1447년(세종 29년) 文科重試에 급제,직집현전(直集賢殿)을 지낸후
집의(執義),판봉상사사(判奉常寺事),호조참의(戶曹參議) 등을 지내고,1461년(세조 7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466년(세조 12년)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급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형조참판(刑曹參判),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역임 하였다.1473년(성종
4년)지중추(知中樞府事),다음해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 留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1476년(성종 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듬해 工曹判書,1479년(성종 10년) 용양위대호군(龍양衛大護軍),이듬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공(李拱)
정평공 순지(純之)의 아들.1469년(예종 1년) 영장(領將)을 거쳐 종성절도사(鍾城節度使)를 지내고 1478년(성종
9년)병조참판(兵曹參判),1480년(성종 11년)동부승지(同副承旨),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482년(성종 13년) 영안순찰사(永安巡察使)의 우후(虞侯)를 지냈다.1483년(성종 14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참판이 되었으며,충청도
관찰사,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485년(성종 16년) 안주목사(安州牧使),1487년(성종 1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
하였다.
이굉(李宏)
?∼1593년(선조 26년)춘무(春茂)의 아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진주 촉성루 싸움에서 순절 하였다.
이전
1526년(중종 21년)∼1602년(선조 35년) 사헌부 감찰 윤종(潤終)의 아들,조선조때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랐고,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를 지냈다.임진왜란 때 順天에서 선장진무(船將鎭撫)로 기병하여 출전,충무공 휘하에서 아들
원남(元男),의남(儀男),지남(智男)과 함께 참전,많은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2등으로 책록 되었다.
이광익(李光翼)
1520년(중종 15)∼1592년(선조 25년) 자는 공좌(公佐) 호는 애일당(愛日堂),사복시정 함의 아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다.격문을 지어 양산도,고경명(高敬命) 등에 보내어 선등(先登)하도록 하였다.
이광주(李光宙)
1540(중종 35년)∼1593(선조 26년) 자는 천중(天中),예빈시 별좌 당의 아들.김하서(金河西)의 문인.1591년(선조 24년)
생원시에 합격,임진란에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격문을 발하고 강화(江華)로 들어가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를 배수하고 분전 하다가 순절
하였다.
이언함
1538년(중종 33년)∼1593년(선조 26년) 자는 경신(景信),훈도 임의 아들.김하서의 문인.1572년(선조 5년) 무과(武科)에
급제,예천(禮泉),거제(巨濟),결성(結城),울산(蔚山)군수를 지냈다.울산 군수 때 임진란을 당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국 하였다.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 되었다.
이영남(李英男)
1566년(명종 21년)∼1598년(선조 31년) 자는 사수(士秀),부사직(副司直) 사종(嗣宗)의 아들, 1584년(선조 17년) 무과에
급제,선전관(宣傳官),훈련원 첨정(僉正),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등을 지내고 1592년(선조 25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휘하의
율포만호(栗浦萬戶)로 전임, 임진란 발발 당시 원 균을 도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왕래하며 청군(請軍)하였고,이후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으로 각
해전에 참전,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년) 태안군수(泰安郡守),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에 전임되어 선정을 배풀었고,1596년(선조
29년)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다.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원 균이 패사(敗死)한후 조방장(助防將)으로 진도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1598년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했다.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이설
?∼1598년(선조 31년). 언간(彦諫)의 아들.1579년(선조 12년) 무과에 급제 봉사(奉事)가 되고,임진란때 이순신 휘하에서
나대용(羅大用)과 같이 거북선을 만들고 유진장(留鎭將),좌별도장(左別都將),훈련판관(訓練判官),만호(萬戶)로 여러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했다.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고 호조 참의(戶曹參議).3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추증(追贈)
되었다.
이정영(李廷英)
1545년(인종 1년)∼1627년(인조 5년) 자는 사선(士先),호는 회헌(晦軒) 진사 백근(百根)의 아들.1589년(선조 22년)
생원시에 합격,임진란에 상중(喪中)이었으나 의병장으로 진천에서 의병을 영솔,신립(申砬) 휘하 충주의 달천(達川)에서 분전 하였다.
선무.호성.청난 원종 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난후에 음죽현감(陰竹縣監)을 지냈다.
이영(李英)
1559년(명종 14년)∼1616(광해군 8년) 자는 자실(子實),계충(繼忠)의 아들.1583년(선조 16년) 무과에 급제,임진란 때
평산(平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수하의 관군과 모집한 의병으로 출전하여
창영(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왜군을 격파 하였다.1601년(선조 34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승진 하였고,1604년(선조 37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이어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제주목사.3도 통제사등을 역임 하였다.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병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이문령(李文齡)
1524년(중종 19년)∼1592년(선조 25년), 자는 희옹(姬翁),판관 하(夏)의
아들.예빈사참봉(禮賓寺參奉).장연훈도(長淵訓導).재령교수(載寧敎授) 등을 역임 하였다.율곡 선생과 수계강론(修契講論) 하였는데 율곡이 매양
석촌존사(石村尊師)라 높이 불렀다.
이벽(李璧)
1546(명종 1년) ∼ ? 순령(舜齡)의 아들.율곡의 문인.임진란 때 동문인 정랑(正郞) 박여룡(朴汝龍) 및 좌랑(佐郞)
조광현(趙光鉉)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관서로 들어가 의주까지 호가(扈駕)하여 해주로 돌아왔다.호성종훈1등(扈聖從勳一等)에 책록 되었다.
이진(李軫)
1557년(명종 12년)∼1616년(광해군 8년).자는 경임(景任),호는 서포(西浦),순령(舜齡)의 아들.율곡의 문인.1588년(선조
2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원주 목사를 지냈고,임진왜란 때 선산부사로 활약하여 호성종훈 1등(扈聖從勳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흡(李洽)
1548년(명종 3년)∼?자는사화(士和).1576년(선조 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여러벼슬을 거쳐 1585년(선조 18년)
충청도도사(都事)가 되고 1591년(선조 24년) 사성(司成)이 되었다.이해 西人으로 정철과 함께 파직 되었다가 1594년(선조 27년)
숙천부사(肅川府使)가 되고 이어 남양부사(南陽府使).문학(文學),장령(掌令),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이무강(李無彊)
자는 경휴(景休),사직(司直),서건(瑞建)의 아들.1536년(중종 31년)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언 장령 등을 거쳐
1548년(명종 3년) 함경도 어사로 나갔다.이어 검상(檢詳),교리(校理),사간(司諫)을 지내고 1550년(명종 5년)
사복시부정(司僕侍副正)으로 편수관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 했으며, 이어 사간(司諫)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 하였다.
이수백(李守白)
1577년(선조 10년)∼1634(인조 12년) 참판 의의 아들.선조 때 무과에 급제,갑산부사(甲山府使) 재임시 선정을 배풀었고
1624년(인조 2년) 평안감사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집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훈 되었으며 양남군(陽南君)에
봉해졌다.
이충신(李忠信)
?∼1592년(선조 25년) 사헌부 감찰 팽년(彭年)의 아들.선조 때 무과에 급제,간성군수(杆城郡守)로 의병을 영솔,충주 달천(達川)에서
신립(申砬)과 함께 싸우다 순절했다. 선무원종 공신3등에 책록 되었다.
이지남(李智男)
자는 정숙(貞叔). 가정대부(嘉靖大夫) 행주부(行主簿) 전의 아들. 임진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형 원남(元男) 의남(儀男)과 함께 의기
격발하여 의병을 모아 충무공 막하로 들어가 정운(鄭運)과 동심합력(同心合力) 하였고 그 후 군량미 1백여석을 싣고 선조(宣祖)의 행재소에 가서
호위 군무로 공을 세웠고 돌아와서는 이순신(李舜臣)의 노량해전(露梁海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1596년 윤 8월
17일 '이지남들이 보러 와서 수군 향상책을 논한 바 있는' 기록이 있다. 1605년 허통(許通)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녹훈되고, 1606년(선조 39)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된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올랐다.
이경신(李敬信)
?~1598(선조31).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팽년(彭年)의 아들. 충신(忠信)의 아우. 무과에 급제. 1592년 전라병사 산하
군관(軍官)을 거쳐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는 훈련판관(訓練判官) 및 전선수리를 전담하고 이후 강계판관(江界判官)이 되었다. 1598년
노량해전(露梁海戰)에 참전 적선을 분익(焚溺)하고 많은 왜적을 격살하는 등 전공을 세우고 순국했다.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 정월 1일에
기록되고 부솔(副率) 양응수(楊應秀)가 행장을 지었다. 1605년 주부(主簿)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어 판관(判官)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이진(李振)
?~1598(선조31). 자는 기보(起甫). 과의교위(果毅校尉) 충백(忠伯)의 아들.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를 지내다. 1597년 정유
재란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노량전에 계방(季方) 이추(李推)와 같이 참전. 총에 맞아 순국했다. 이에 타고 다니던 말이 공의 적삼을
물고 돌아와 전의(全義) 대완산(大完山) 고조부 첨절제사공 이희년(李希年) 산소 위쪽에 내려 놓고 말도 죽으니 그 자리에 초혼장을 모셨다.
1646년 인조 24년에 이러한 충절로 승지(承旨)로 추증됐다.
이추(李推)
?~1598년(선조 31) 자는 경서(景恕). 과의교위(果毅校尉) 충백(忠伯)의 아들. 1597년 정유재란시 국가의 위급함을 통탄하고
왜적의 세력이 크게 떨침을 분하게 여겨 백형(伯兄) 봉사공(奉事公) 이진(李振)과 함께 노량전에 참전, 백형이 전사함을 보고 앞장서
역전(力戰)하다 순절하여 전의(全義) 대완산(大完山) 고조부 첨절제사공(僉節制使公) 이희년(李希年) 산소 좌편 언덕에 초혼장을 모셨다.
1646년 인조 24년 이 충절로 감찰(監察)로 추증됐다.
이대명(李大鳴)
자는 문원(聞遠). 창신교위(彰信校尉) 신백(信伯)의 아들. 임진왜란에 포수로 참전 장사랑(將仕郞)에 오르다. 1597년(선조 30)
정유(丁酉) 3월 12일 형조판서 김명원(金命元)에게 혐의받은 조한(趙漢)을 신구하고 인의를 몸소 궁행하여 왕명으로 훈련도감에서 후대받았고,
군사기밀에 능통하고 오래 머문 지방에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또한 난중에도 학문에 정심. 주역(周易)과 소미통감(小微通鑑)을
이덕형(李德馨)에게서 구하는 등 문필로서 선비의 도를 지켜나갔다. 공은 1618년(광해 10) 무오(戊午)에 광해혼조에도 70여세 노구로 식년시
무과에 합격. 이같은 참전유공. 학덕. 장수로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嘉善大夫 僉知中樞府事)로 추증됐다.
이덕남(李德男)
명종조(明宗朝) 원종공신(原從功臣) 준(遵)의 아들. 임진왜란에 참전. 1605년 주부(主簿)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녹훈되고, 공신가자(功臣加資)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계희(李繼希)
1613년(광해군 5년)∼1636년(인조 14년).의문의 아들.훈련원봉사(奉事)를 역임 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호서백(湖西伯) 정세규(鄭世規)의 비장으로 소사진(素沙陣)에서 순절 하였다.
이몽길(李夢吉)
1564년(명종 19년)∼? 자는 응휴(應休), 대명(大鳴)의 아들.신잡의 문인. 1606년(선조 39년) 생원시에 합격 하였다.성리학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이월사(李月沙), 유필선(柳弼善) 등 제현과 더불어 낙중팔현(洛中八賢)으로 불리웠다.사복사정(司僕寺正)에 추증
되었다.
이몽량(李夢良)
1568년∼? 첨지중추부사 대명(大鳴)의 아들.선조 때 무과에 급제,경상우도병마우후(慶尙右道兵馬虞候)를 지냈다.선전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사신에게 금은을 하사 하였으나,유독 책자를 청하여 중상을 받았다.
이대신(李大新)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 사영(仕英)의 아들. 제주 판관을 지내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하였다.
이득곤(李得坤)
1587년(선조 20년)∼?. 자는 덕후(德厚),호는 식파정(息波亭),사복사정(司僕寺正) 몽길(夢吉)의 아들.성경(聖經)에 뛰어나
광해군조에 여러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산림에 들어가 유유자적하니 세인들이 상산(常山)처사라 일컬었다.
최명길(崔鳴吉),채익선(蔡翊先),김득신(金得臣) 등과 도의의 친교를 맺었다.저서에 식파정시문집(息波亭詩文集)이 있다.
이익주(李翊周)
1634년(인조 12년)∼1704년(숙종 30년) 자는 문보(文甫),호는 한계(閑溪),오(鰲)의 아들.1660년(헌종 1년)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합격,해주목사를 지냈다.효행(孝行), 재행(才行)이 출중하여 삼조삼읍(三曹三邑)을 역임 하였고,안악군수(安岳郡守)
재임시에는 치적이 훌륭하였다.사헌부대사헌,좌승지(左承旨)에 추증 되었고,보사종훈일등(保社從勳一等)에 책록 되었다.저서에 한계집(閑溪集)이
있다.
이성(李晟)
정헌(廷憲)의 아들.1605년(선조 38년) 청산현감,1607년(선조 40년),흡곡현령(흡谷縣令)을 거쳐 1617년(광해군 9년)
오위(五衛)에 재직시 광해군을 모해 하려는 서궁의 흉계를 규탄하는 유소(儒疎)를 올렸다. 양능군(陽陵君)에 봉해지고, 보조공신 호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이격(李格)
1682년(숙종 8년)∼1759년(영조 35년).자는 사정(士正),호는 학곡(鶴谷),영련(英璉)의 아들.1708년(숙종 34년) 식년문과에
급제 감찰(監察)을 거쳐 영조 때 문천군수(文川郡守)가 되고,장령(掌令) 재임시 어명으로 군수 및 도백(道伯)의 속직자를
파면하고,1749년(영조 25년)판결사(判決事)에 특진,1756년(영조 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 되었다. 저서에 학곡집(鶴谷集)이 있다.
이입신(李立身)
1625년(인조 3년)∼1689(숙종 15년) 자는 현부(顯夫),호는 의재(毅齋),양능군(陽陵君) 성(晟)의 아들.송시열의
문인.1663년(현종 4년) 식년문과에 급제,충청수사(忠淸水使)가 되었다. 1680년(숙종 6년)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시 별군직(別軍職)으로
공을 세워 분충효의병기보사공신(奮忠效義炳畿保社功臣)에 책록 되고,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양흥군(陽興君)에 봉해졌다.이어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을 거쳐 전라병사(兵使).평안감사를 역임 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관직을
삭탈당하고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 사망하였다.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기사환국시의 희생자가
복권됨에 따라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판돈영부사(判敦寧府事)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증직 되었다.
이인석(李寅錫)
1650년(효종 1년)∼1727년(영조 3년) 자는 천뢰(天賚),진강(震綱)의 아들. 1681년(숙종 7년) 식년문과에
급제,무장(茂長),문천(文川),남원(南原),진주(晉州) 등 12 주목을 지내고 문천군수 재임시 선정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1719년(숙종
45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었으며 후은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동지중추부사를 역임 하였다.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이최현
1721년(경종 1년)∼1790년(정조 14년).자는 경량(景良),호는 삼기재(三寄齋),정랑(正郞) 성운(聖運)의 아들. 1763년(영조
39년)증광진사(增廣進士)에 합격,정조가 그의 박식에 경탄하여 재옹(才翁)이란 호를 내리고,시인들이 박아군자(博雅君子)라 칭했다. 저서에
삼기재집(三寄齋集)이 있다.
이희영(李喜英)
?~1801년(순조 1년) 자는 추찬(秋餐)진사 소의 아들.여주출신.세례명은 루카스,천주교를 믿어 성화(聖畵)를 많이 그렸으며 서양화가로
이름이 알려졌다,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조카 현(鉉),교도 김백순(金伯淳) 등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병수(李炳壽)
1855년(철종 6년)∼1941년 자는 복일(福一),호는 석전(石田).겸산(謙山),홍구(洪九)의 아들.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문하에서 고명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1895년(고종 32년) 국모가 시해되자 이듬해 나주 향교에 의소(義所)를 설치 상소문을 올리고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지어 전국에 발송했다.만년에는 송산정사(松山精舍)에서 후진양성에 전념 하였다.저서에 겸산집(謙山集),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등이 있다.
이능권(李能權)
1864년(고종 1년)∼1909년(융희 3년) 정환(鼎煥)의 아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이 만국평화회의에 참판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 등을 파견 시킬 때 이들을 국경까지 호송하고,이등박문(伊藤博文)이 조선군을 해산시키고자 고종이 의병화 밀령을 내려
대장직을 주었으나 의병장으로 강화에 들어가 대동창의진(大同倡義陣)을 창건,군자금과 군량미를 조달하여 해주(海州) 등지 까지 지원하고,왜적
200여명을 선두포(船頭浦)로 유인하여 섬멸했다.뒤에 수도(首都) 탈환에 참전차 한양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1909년 9월 순국했다.
전국훈장국민장(575호)이 추서 되었다. |